〈85·끝〉눈앞의 보배창고가 왜 보이지 않는가

23. 광선인(光禪人)에게 주는 글

근본실상에 대한 의심 간절해야

의심 해결해줄 명안종사 찾게 돼

본문: ‘적실(親切)’한 뜻을 얻고자 할진댄, 무엇보다도 구하려 하지 말라. 구해서 얻으면 벌써 알음알이에 떨어진다.

해설: 본분의 마음자리는 누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밖으로 찾고 구해서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스로 확인해야 하며, 무언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통 방광에 속은 어리석은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이미 비밀없이 훤칠하게 드러난 ‘이 일’ 외에, 달리 무슨 일이 있다고 찾고 구하겠는가. 눈앞에 분명히 드러나 있어서 너무나 당연하고 평등한 이 평상심 외에 조금이라도 특별한 구함과 얻음이 있다면, 그것은 식광(識光)의 알음알이에 떨어진 외도(外道)일 뿐이다.

본문: 더구나 이 큰 보배창고는 예부터 지금까지 역력하게 텅 비고 밝아서 시작 없는 오랜 시간으로부터 자기의 근본이니, 모든 움직임이 그 힘을 받든다.

해설: 아무런 비밀이 없이 다 드러나 있는 본래 ‘마음자리’는 과거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포용하되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한 모습으로 텅 비고 밝아서, 참으로 훤칠하여 끝 간 데가 없다. 그런데 또 뭘 찾고 구하겠는가?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실상이 스스로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듣고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텅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보배창고가 눈앞에 역력하다는데, 왜 나는 도무지 깜깜할 뿐인가? 이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뜨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시급하게 공부인연을 열어주는 선지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마음공부의 중요한 출발선은 스스로 근본 실상에 대해 의심이 간절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그 의심을 해결해줄 명안종사를 찾게 된다.

본문: 오로지 망상을 쉬어 한 생각도 생기지 않는 곳에 도달해야 그대로 투철히 벗어나 망정의 티끌에 떨어지지 않고 ‘알음알이(意想)’에 머물지 않는다.

해설: 이 편지를 쓴 원오극근선사의 시대에는 아직 묵조선과 간화선이 태동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비록 ‘오로지 망상을 쉬어 한 생각도 생기지 않는 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을 해도 이것이 그대로 묵조선의 입장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원오극근스님의 시대까지는 조사선 방식에 따라 수행하고 지도했다고 볼 수 있다. 조사선 수행방식은 우선 본인이 근본에 대해 간절한 의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근본을 알고 싶어 목마른 학인이 명안종사를 찾아 부딪쳤을 때, 선지식의 한 마디에 바로 언하변오(言下便悟) 하든지 아니면 그 한 마디가 설상가상으로 금강권(金剛圈) 율극봉(栗棘蓬)이 되어 가슴을 죄어오는 것이다.

만일 언하변오하지 못한 학인이 선지식 밑에 계속 남아서 공부하고자 한다면, 알려고 하는 그 입장을 사무치게 쪼아나가지 않고서는 배겨낼 도리가 없다. 조사선의 입장에서는 학인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직접 가르마를 타주지 않고 스스로 의심이 차올라 결국 돈오케하는 가파른 방법을 쓰는 것이다.

뒷날 간화선은 사대부들도 들어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법식에 맞는 인연들을 친절하게 베풀어서 열어놓은 수행법이다. 명안종사는 눈을 뜨려고 애쓰는 사람을 향해서 공부하게 장치된 수단을 베풀어 의심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밀어넣는 것이다.

만일 이 간화장치에 제대로 결려든 학인이라면, 몰람결에 스스로 잡들어진 의심이 활구(活句) 화두가 되어 혼침(昏沈)과 도거(掉擧)는 물론 공부상의 온갖 역경계와 순경계를 이겨내고, 의정(疑情)을 거쳐 의단(疑團)으로 타성일편(打成一片)되어 마침내 타파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울퉁불퉁한 구리뭉치를 갖다 던져주면서 ‘거울을 만들어라’ 하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구리뭉치를 두들겨서 펴야 하고, 편 뒤에는 거친 사포와 섬세한 거즈로 문질러 거울로 만들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지르다 보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 이르러’ 홀연히 훤칠한 자기 얼굴을 비춰보게 되는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1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