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공부에 뜻이 있다면 선지식부터 찾으라

22. 종각선인(宗覺禪人)에게 주는 글

근본에 철저하게 사무쳐

마음의 실상을 자각해야

생사일대사 해결할 수 있어

본문: 공안을 머리로 풀고 이론으로 따진다면 한바탕 너절한 잡동사니만 불려낼 뿐이다.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을 추궁해 보건대, 위로는 아직 작가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였으며 스스로의 대장부의 뜻과 기상을 걸머지질 않았었다.

해설: 공안이란 분별망상을 조복받기 위해서, 그 뿌리인 무명업장을 녹이는 ‘의심덩어리(疑團)’를 시설하는 장치이다. 의단이란 그 어떤 논리와 궁리로서도 뚫을 수 없는 은산철벽과 같은 것인데, ‘조사들이 시설한 그 관문(祖師關)’을 뜻으로 풀어서 이해하는데 그쳐버린다면 공안의 본래 취지와는 멀어져 버린다. 이렇게 뜻으로 푸는 공안을 사구(死句)라고 한다. 공안을 사구로 푸는 것은 아직도 명안종사를 만나지 못하여 공부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지식을 급히 찾지 않고 뭔가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이 공부의 뜻을 근본에 두지 않고 지엽말단에 머물기 때문이다.

근본이란 마음을 밝히고 생사일대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근본에 뜻을 둔 대장부라면 바로 의심이 일어나 꽉 막힐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일거수일투족을 마음이 한다는데 아직도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공안 상에서 의심이 일어나 꽉 막히는 것을 활구(活句)라고 한다. 이 활구가 곧 화두인 것이다. 만일 활구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고 공안을 머리로 풀고만 있다면, 아무리 기발한 풀이를 해낼지라도 허망한 일이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분별망상에 끄달리는 것은 물론, 섣달 그믐날에 혼비백산하여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본문: 그러므로 일찍이 뒤로 물러나 자기에게로 돌아서서 이제껏 가져왔던 승묘(勝妙)하다는 생각을 놓아버리지 못하였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벗어난 본분의 일대사인연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분명하게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해설: 공부의 뜻을 근본에 두지 못하면, 자칫 경계에 빠지기 쉽다. 송화두를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경을 읽는다든지, 다라니를 한다든지 나름대로 이와 같은 수행을 오래 하다보면 갑자기 고요해지고 편안한 경계를 맛보기도 하고, 몰람결에 공안의 뜻이 풀리기도 하며, 불보살이 앞에 나타나는 신비한 체험을 할 수도 있게 된다. 이럴 때 선지식의 지남(指南)과 호법을 받지 못하면, 십중팔구 그 경계에 집착하여 그것이 불교이고 가피인양 착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혼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그런 길로 인도하여 매달리게 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불교를 믿는 과정에서 왕왕 이와 같은 입장들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여기에 머물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근본에 철저하게 사무쳐 마음의 실상을 자각해야지만, 생사일대사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부의 요점은 명안종사를 만나 바른 공부법과 인연을 맺는데 달려있다.

이 공부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먼저 선지식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근본을 의심하여 끝내 마음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는 바른 길이다. 부처님 이하 역대 조사들께서 그것을 증명하여 전등해주신 것이다.


본문: 이렇게 한다면 일생을 애써 수고한다 해도 꿈에서도 보지 못하고 말리라. 때문에 옛사람은 “보리는 말을 떠났으며, 애초부터 얻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해설: 보리심을 내라고 하지만, 내야 될 보리심이란 본래 없다. 그래서 옛말에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하랴!”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보리심을 내야지만 공부 인연에 나아갈 수 있는 이에게는 또 ‘보리심을 내라’고 해야 한다. 무명업식 속에 있는 이가 도인흉내를 내서 말로만 ‘결코 보리는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큰 착각이기 때문이다. 도인이 때에 당해서 상대의 근기를 살펴서 ‘내라, 마라’ 하는 것은 그때의 일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 말만 배워가지고 자기 공부로 삼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고질적인 선병(禪病)인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1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