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온초감사(蘊初監寺)에게 주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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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조의 은혜 조금이나마 갚으려면
자비광명 위신력으로 인연 있는
많은 이들과 이익 나눌 수 있어야
본문: 만일 실제로 깨달아 들어간 곳이 있다면 일어났는지 멸했는지를 식별하고, 나아갈지 물러날지를 알며, 허물을 쉴 줄 알아서 번뇌를 떠난다. 나날이 가까워지며 더욱 좋은 쪽으로 변해가되, 소굴을 지키지 않고 올가미에서 벗어나와 천하 늙은이의 혀끝을 의심치 않는다.
해설: 발심한 학인이 이치를 밝히는데 만족하지 않고 선지식의 지남(指南)을 받아 근본에 대해 의심을 일으켰다면, 곧 정신적인 벽을 만나 사방에서 옥죄어 들어오는 율극봉, 금강권에 갇히게 된다. 여기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다가 그 벽이 무너지면, 곧 앞뒤가 끊어져서 끝 간 데 없이 시원함을 맛보게 된다. 이렇게 실제로 깨달아 들어간 곳이 있어야, 비로소 일없는 사람이 되어 근본자리에서 쉴 줄 알게 된다. 본래 무소득(無所得)임을 깊이 실감하고 살얼음 밟듯이 조심하면서 세월을 보내게 되면, 남은 습기가 녹으면서 생사의 윤회바퀴로부터 벗어나 불조의 가르침에 빈틈없이 계합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생철(生鐵)을 단련하듯 노력 수행하면서 공양한 뒤에야 다함없는 법등을 태우고 끊임없는 도를 실천한다. 몸과 목숨을 버리면서 뭇 생령을 건져내 그들 각자가 속박의 굴레를 벗어나 집착의 결박을 버리게 한다. 그러면 부처나 조사에 집착했던 병이 모두 치유되고 해탈의 깊은 구덩이에서 이미 벗어나서 함이 없고 하릴없는 쾌활한 도인이 되리라.
해설: 미세망념의 묵은 습기는 참으로 끈질긴 것이어서 완전히 한 덩어리를 이루기까지는 생철을 단련하듯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마침내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열매가 맺으면, 시절인연 따라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행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나가대정의 당처에는 중생은 물론 부처도 있을 수 없으며, 번뇌는 물론 반야도 세울 수 없다. 오래 익혀서 더 나아갈 데가 없는 구경처(究竟處)를 밟게 되면, 다시는 이법(二法)인 선정해탈을 구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 한가로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본문: 그러나 자신을 제도하고 나면 모름지기 행원(行願)을 버리지 말고 모두를 제도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참고 견디면서 살바야해(薩婆若海)에서 배가 되어야만 비로소 조금이나마 상응함이 있으리라.
해설: 모름지기 참다운 공부인이라면 자리(自利)가 이루어진 뒤에는 반드시 이타(利他)의 보현행원을 실천해야 한다. 고통 받는 이 사바세계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태워주는 반야용선이 되어서, 자비광명의 위신력으로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줄 수 있어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불조의 은혜를 갚고 그 혜명을 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본문: 바싹 메마른 사람이나 노주등롱(露柱燈籠)이 되지 않도록 삼가야 한다. 정갈스런 공(毬)처럼 되어 자신의 일만 마친다면 무슨 일을 이루랴. 이 때문에 옛 스님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한 가닥 길을 가면서 보답할 수 없는 큰 은혜를 감당하여 보답하라고 권하였던 것이다.
해설: 참된 공부인이라면 꼼짝 안하고 그루터기나 지키면서 혼자만의 해탈에 빠져있거나, 그저 노주 등롱처럼 앉은 자리에서 주변이나 겨우 밝히고 마는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예불을 올릴 때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하듯이, 널리널리 회향하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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