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온초감사(蘊初監寺)에게 주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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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치를 배워 이해하는 것과
의심덩어리를 씹고 소화시켜서
생사고해 벗어나는 것은 천지 차
본문: 그대에게 한 마디라도 해주면 벌써 더러운 물을 사람에게 끼얹는 셈이니, 더구나 눈을 깜빡이고 눈썹을 드날리며 선상을 치고 불자를 세우며 “이 무엇이냐?”고 묻고 할을 하고 방망이질을 하는 것 등의 이 모두는, 평지에 쌓인 뼈 무더기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해설: 원오극근스님이 소주(蘇州) 명인사(明因寺)에 머물던 온초감사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이 일단의 일은 대명천지에 온통 드러나 있어서 새삼 뭐라고 말을 하면 머리 위에 머리를 얹는 것과 같고 주둥이에 주둥이를 대는 꼴이 된다. 입을 여는 순간 틀렸고, 생각이 일어나면 곧 어긋난다(開口卽錯 動念卽乖). 때에 당해 선지식이 법을 가르쳐주려는 노파심절에서 학인에게 눈을 깜빡이고 눈썹을 치뜨거나, 선상을 치고 불자를 세우거나, 할(喝)을 하고 방(棒)을 휘두르는 것도 사실은 이미 더러운 물을 한 바가지 끼얹은 것인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본문: 그런데 좋고 나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부처와 법과 선과 도를 물으면서 자기를 위해 달라 하고 지도해 주기를 빌며, 향상이니 향하니 하는 불법의 지견, 말씀이나 도리를 구하니 이 역시 진흙 속에서 흙을 씻고 흙속에서 진흙을 씻는 격이어서, 어느 때에 말쑥이 벗어난 경지에 이르겠느냐.
해설: 학인이 일단 선지식에게 묻고 근본을 의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받았다면, 한 자리에 앉아 스스로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결판이 날 때까지 애써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알음알이를 구해서 짧은 지견에 만족한다면, 그럴수록 무명 업식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이 공부에 뜻을 둔 학인이라면 철저히 깨쳐서 스스로 증득해야지, 공연히 남의 말이나 이해하고 기억하는 지해종도(知解宗徒)가 되어서는 공부와는 영영 멀어지고 말 것이다.
본문: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듣고는 문득 속으로 따지기를, “나는 알아버렸다. 불법은 본래 아무 일 없는 것으로서 누구나 다 갖고 있다. 종일토록 밥 먹고 옷 입는데 무엇이 조금이라도 부족하였던가?” 라고 하면서, 문득 하릴없는 일상의 경계 속에 안주해버린다. 이야말로 ‘이러한 일’이 있는 줄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분 속의 사람이라야만 위로부터의 종승본분(宗乘本分)을 알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해설: 혹자는 “불법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둘이 아니다. 삼라만상이 불법 아님이 없다”고 말하며, “불법이 어디 따로 있나, 남거나 모자람이 없이 다 이 속의 일이다”는 알음알이를 짓고는 일상 경계 속에 그대로 안주해버린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루 종일 불법 속에 있다는 착각 속에서 그저 마음 비우는 것이 요긴한 일인 줄로만 알고,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는 허망함 속에 빠져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두운 무기(無記)의 굴속을 자기 집으로 착각한 어리석은 짓이다.
불법이란 그런 건해지(乾解知)가 아니라, 불안(佛眼)과 법안(法眼)을 눈뜨는 것이다. 반드시 실제 체험을 통해 바른 안목을 열어야만, 불법 속에 살면서 불법을 소화시킬 수가 있다. 이치를 배워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의심덩어리를 씹고 소화시켜서 생사의 고해로부터 말쑥이 벗어나는 것과는 천지현격이다. 그래서 역대 선지식들께서는, 직접 돈오견성을 체험하고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으라(以悟爲則)’고 그토록 강조한 것이다. 본분의 소식을 바르게 살필 수 있는 정법안장을 갖춘 자라야만이 종지종통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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