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어떤 말에 지난날 속박 단박에 벗었나

19. 고선인(杲禪人)에게 주는 글

“네가 말한 허다한 망상 끊어질 때

자나 깨나 하나인 곳에 도달할 것…”

본문: 고납자(?衲子)는 지난날 재상이었던 장무진공(張無盡公)에게 큰 그릇으로 인정되어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빼어나게 뛰어난 기상을 자부하고 좀스럽게 자잘한 일 따위는 하려들지 않았다.

해설: 승상(丞相)을 지낸 무진거사 장상영(張商英, 1043~1121)은 처음에 동림상총 선사에게 참학한 후 도솔종열(兜率從悅, 1044~1091) 선사의 재가 법제자가 되었다. 대혜스님은 담당문준 선사가 돌아가신 다음해(1116년) 담당문준 선사의 탑명(塔銘)을 부탁하러 무진거사를 찾아갔다. 첫 만남에서 73세의 무진거사는 대뜸 27세의 젊은 대혜스님을 시험하였다.

“무슨 일로 멀리서 오셨습니까?”

“늑담화상(담당선사)께서 돌아가시어 다비에 붙이니 눈동자와 치아와 염주는 타지 않았고 무수한 사리를 얻었습니다. 산중의 노장 스님들이 상공의 대수필(大手筆)로 탑명을 지어 후학을 격려해 주셨으면 하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지금 스님께 질문을 하겠으니 만일 대답하신다면 탑명을 지어드리겠지만, 대답하지 못한다면 노잣돈을 드릴 테니 얼른 돌아가십시오.”

“상공께서 물어주십시오.”

“담당스님께서 눈동자가 타지 않았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그런 눈동자를 묻지 않았습니다.”

“상공께서는 어떤 눈동자를 물으셨습니까?”

“금강 눈동자입니다.”

“금강 눈동자라면 상공의 붓 끝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그분을 위해 광명을 찍어 천지를 비추어야 하겠군요.”

그러자 대혜스님이 의자 앞으로 다가 앉으면서 “선사(先師)를 위해 다행한 일입니다. 상공의 탑명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장상공은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본문: 진실하게 서로 만나 한 마디 말에 기연이 투합하여 지난날의 속박을 단박에 벗어버렸다. 비록 철저히 깨닫지는 못했으나, 요컨대 훤칠하여 다른 사람의 억압과 속박을 받지 않는 통쾌한 자였다.

해설: 대혜종고스님은 만 35살에 원오극근 문하에 들어가서 2년 만에 두 번 깨닫게 되는데, 이 편지는 그 두 번의 깨달음 중간에 써준 것이다.

‘진실하게 서로 만나 한 마디 말에 기연이 투합하여 지난날의 속박을 단박에 벗어버렸다’는 것은 대혜스님의 첫 번째 깨달음의 기연을 가리킨다. 그리고 ‘비록 철저히 깨닫지는 못했으나…’는 아직 대법(大法)은 밝히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혜스님은 <서장> 제46 ‘향시랑 백공에 대한 답서’에서 자신의 첫 번째 깨달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보내온 편지에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꿈과 생시가 하나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 이 물음은 제가 36세(1124년, 만 35세)에 의심했던 것이라서,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가려운 곳을 긁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때 이 문제를 원오 선사(先師)께 여쭈니, 다만 손을 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만, 그만하고 망상을 쉬어라. 망상을 쉬어라. … 네가 말한 허다한 망상들이 끊어질 때, 저절로 자나 깨나 하나인 곳에 도달할 것이다.’ … 뒤에 선사께서 ‘모든 부처님이 나투는 곳에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온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홀연히 ‘가슴에 걸려있던 것(碍膺之物)’이 내려갔습니다.”

대혜스님은 이때 온몸에 땀이 나면서 문득 앞뒤의 시간이 끊어지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9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