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는 물론 마음도 취하지 않는다

〈57〉14. 담주(潭州) 지도각(智度覺) 장로에게 드리는 글

구름 벗어나면 즉시 해 드러나는 법

경계와 마음 함께 벗어나야 참된 법

본문: 예부터 크게 통달한 사람은 지극한 곳을 철저히 믿기만 하면 재빠른 새매와 같아서, 바람 타고 날아올라 해를 빛내고 등 뒤로 푸른 하늘을 어루만지면서 당장에 벗어나, 하루 종일 실낱만큼의 장애와 막힘도 없었습니다.

해설: 근본을 밝히지 못하면 정신적인 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아서 답답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마치 쥐가 먹이를 찾아 소뿔로 만든 틀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나아가지도 못하고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천하가 무너지고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져서, 고치에 갇혀있던 애벌레가 마침내 나비가 되어 첫 비행에 나서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더 익어지면 매처럼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자유자재로 소요하면서 하루 종일 날아도 흔적이 없다.

본문: 칠통 팔달하여 말아 들이고 펴며 사로잡고 놓아주면서, 성인의 지위에도 오히려 머물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 범부의 부류에 처하려 하였겠습니까?

해설: <전심법요>에서 황벽스님은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성인은 마음을 취하나, 경계와 마음을 함께 잊어야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마음이 툭 터진 ‘무의도인(無依道人)’이라면 경계는 물론 마음마저도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법도 얻을 바가 없고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고 했다. 실제로 경계에 초연하기보다는 법에 초연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본문: 가슴은 텅 비어 지금과 예를 모두 감싸고 풀 한 줄기 집어서 장육금신(丈六金身)을 만들고, 장육금신을 집어서 한 줄기의 풀을 만들기도 합니다.

해설: 마음이 크다고 하면 삼천대천세계를 감싸고도 남음이 있고, 작다고 하면 겨자씨와 같은 아주 미세한 것에도 깃들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크다 작다’하는 것을 넘어섰다. 그래서 이것을 비유하여 한 줄기 풀을 가지고서 ‘거대한 금빛 부처님 몸(丈六金身)’이나 ‘범찰(梵刹)’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벽암록> 제60칙 ‘조주의 주장자’의 평창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석가여래께서 과거세에, 연등불(燃燈佛)의 세상에서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고서 연등불을 기다리자 연등불께서 말씀하셨다. 이곳에 범찰(梵刹)을 세울지니라.’ 그때에 한 천인이 한 줄기 풀을 땅에 꽂은 뒤에 ‘청정한 가람을 세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조주록>에는 조주스님이 법상에 올라 하신 말씀이 전한다.“이 일은 마치 손바닥에 있는 밝은 구슬과 같아서,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가 나타나고, 떼놈이 오면 떼놈이 나타난다. 나는 풀 한 줄기를 가지고 장육금신을 만들기도 하고 장육금신을 가지고 한줄기 풀로 쓰기도 하니, 부처 그대로가 번뇌며 번뇌 그대로가 부처이다.”

본문: 그렇기는 하나 애초에 낫고 못하고, 취하고 버림이 없어 오직 활발하고 우뚝하게 기연에 응할 뿐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아도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奪人不奪境), 어떤 때는 경계는 빼앗아도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奪境不奪人),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기도 빼앗지 않기도 하면서(人境俱奪俱不奪) 형식과 종지를 초월하여 완전히 말쑥한 경지를 이룬 것입니다.

해설: 임제스님은 학인을 제접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교화방편으로 ‘사료간(四料簡)’을 말씀하셨다. 첫째 마음에 집착하고 있는 상근기의 학인에게는 그 마음을 빼앗고, 둘째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 중하근기에게는 그 경계를 빼앗는 것이다. 셋째 경계와 마음을 함께 빼앗는데, 즉 ‘쌍으로 양변을 막는다(雙遮二邊)’는 것이다.

넷째 마음과 경계를 함께 빼앗지 않는데, 즉 ‘쌍으로 진(眞)과 속(俗)을 비춘다(雙照二諦)’는 것이다. 그런데 구름이 벗겨지면 해가 즉시 드러나듯이 쌍차와 쌍조는 동시에 이루어지므로(遮照同時), 여기서 원오극근스님도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기도 빼앗지 않기도 한다’는 중도(中道)로서 말쑥한 경지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