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은 물론 깨달음까지도 버려야

〈56〉14. 담주(潭州) 지도각(智度覺) 장로에게 드리는 글

남 먹다 버린 알음알이로 채운다면

‘생사대사 결판 짓는 길’ 요원할 뿐

담주는 호남성에 있다. 동정호 남쪽에 있어서 호남(湖南)이라고 부르는 이 땅에는 상(湘)강과 담(潭)주가 있어서, 예로부터 호남의 별칭으로 ‘상담(湘潭)’이라고 불렀다. 마조스님이 득도하고 석두스님이 교화를 펼친 남악형산(南岳衡山)이 호남성에 있다.

본문: 지극한 도는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깊고 오묘하여 애초에 등급이나 사다리를 세우지 않고 만 길 절벽에 서 있으니, 이것을 본본 소식이라 합니다.

해설:<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고 오직 간택을 꺼린다(至道無難 唯嫌揀擇)”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도는 ‘쉽다, 어렵다’의 상대적인 차원을 벗어나 있다. 깨달음에 눈 뜬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쉽고 분명한 것은 없지만, 말로 드러낼 수는 없기에 불가사의 해탈법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극한 도는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 가는 곳이 멸하여서(心行處滅), 선문에서는 지위나 점차를 논하지 않고 오직 ‘백 척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가거나(百尺竿頭進一步)’ ‘절벽에 매달린 채 손을 놓아버리는(懸崖撒手)’ 직절(直截)한 수단만을 살필 뿐이니, 이것을 본분소식이라고 한다.

본문: 이 때문에 마갈타에서 방문을 잠그고 바른 법령을 시행한 일과 비야리에서 침묵으로 근본 종지를 천양한 것도 오히려 본분의 선지식이 있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터이니, 하물며 현묘함에 빠져 마음과 성품을 설명하고 따지는 경우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해설: 석가세존께서 마갈타국의 니련선하 강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샛별을 보고 성도(成道)하신 후, 한동안 진리를 음미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신 것이 이미 바른 법령을 시행하신 것이다. 한편 유마거사가 비야리에서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며 병들어 누웠을 때, 32보살이 병문안을 와서 불이법문을 문답했다.

마지막에 문수보살이 “나는 일체법에 대하여 말할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알 수도 없어서 일체 문답을 여읜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말하고는, 유마힐에게 묻되 “우리들은 이미 저마다 말했거니와 그대는 무엇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이라고 여깁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유마힐이 묵연(?然)하여 잠자코 있으니 문수가 찬탄하되, “언어와 문자까지도 여윈 것이 보살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드는 길입니다” 하였다. 성도 후 부처님께서 움직이지 않으신 것과 유마거사의 침묵이 비록 찬탄할 일이기는 하나,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보면 조사를 죽인다’는 임제스님의 말처럼 불출(不出)과 침묵의 흔적까지도 말끔히 쓸어버려서 뒷사람이 흉내 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눈 밝은 본분제자의 마땅한 도리인 것이다.

본문: 땀 냄새 밴 장삼을 착 붙여 입고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더더욱 낭패를 볼 뿐입니다. 이것은 소실과 조계의 가풍과는 전혀 다르며, 임제 스님과 덕산 스님의 기량은 뼈를 발라낸 듯하며, 용과 호랑이가 달리고 천지가 회전하듯 하여서, 경쾌한 사람은 끝내 진흙탕으로 이끌지 않는 법입니다.

해설: 미혹은 물론 깨달음까지도 미련 없이 버려야 하거늘, 남들이 먹다 버린 썩고 냄새나는 알음알이들을 주워들어서 머릿속을 더부룩하게 채우고 있다면 생사대사를 결판 짓는 길은 요원할 뿐이다.

언어문자에 의지하고 지위점차를 밟는 공부는 숭산 소림사 소실봉 아래에서 면벽하던 보리달마 대사가 제창한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선법과 그것을 물려받아 대성한 육조혜능 대사의 ‘돈오법문(頓悟法門)’과는 천지현격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의 할(喝)과 덕산스님의 방(棒)은 마치 거위왕이 물과 우유가 섞여 있어도 우유만 가려서 마시듯이, 그 기봉이 신속 정확해서 온갖 ‘알음알이(知解)’의 진흙탕에 빠진 공부인의 망상을 단박에 깨트려서 그 뿌리를 뽑아주었던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