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머리·경전 집착하면 망념 극복 어려워

〈51〉12. 보현사(普賢寺) 문장로(文長老)에게 드리는 글

본문: 지난 날 처음 스승(五祖法演)을 뵈었을 때 내가 공부한 바를 털어놓았는데, 그것은 모두 보고 들은 기연의 어구들로서 모두 불법과 심성의 현묘함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러자 노스님께서는 무미건조한 두 구절을 들려주셨는데, “유구(有句)와 무구(無句)는 칡덩굴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였습니다.

해설: 이 편지에서 원오극근스님은 보현사 문장로에게 자신이 깨닫기 전에 공부한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천성에서 태어난 원오스님은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리며 유교 경서에 박통하였는데, 출가한 후 처음에는 경론을 공부했다. 이후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옥천승호, 대위모철, 회당조심, 동림상총 등의 선사들을 찾아 공부하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이분들을 긍정하지 않고 거만한 모습을 보이자, 마침내 태평산에 주석하고 있던 법연 선사를 만나보라는 권유를 받게 됐다. 원오스님은 법연선사를 찾아뵙고 자기가 아는 바를 다 말했지만, 그것은 실증실오(實證實悟)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론일 뿐이라며 모두 거부당했다. 그리고 ‘유구와 무구는 칡덩굴이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有句無句 如藤倚樹)’는 화두를 다시 참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본분실상 앞 어떤 오묘한 도리도 망념일 뿐

活句 뜨거운 화로 같아 알음알이 즉시 녹아

본문: 처음에는 이리저리 재주를 부려보았고, 다음으로는 논리를 세워 설명하였으며, 끝에 가서는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꺼내는 족족 간략히 물리치셨으니, 이윽고 나도 모르는 결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끝내 들어갈 수가 없어 재삼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하였더니 법어를 내려주셨습니다.

“네가 견해로 헤아리는 것이 다하여 일시에 모두 없어져버리면 자연히 깨달으리라.”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벌써 너에게 다 설명해 주었다. 가거라.”

해설: 화두를 견해로 헤아려서는 도저히 뚫어낼 수가 없다. 금강권(金剛圈), 율극봉(栗棘蓬)에 꽉 막혀서 몰람결에 마주하게 되었을 때,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여야하기 때문에 선지식은 “나는 이미 다 설명해주었으니, 네 힘으로 뚫어라!” 하고 더욱 매섭게 쇠채찍질 하면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인정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질수록 의심덩어리는 더욱 단단하게 뭉쳐진다. 극에 달하면 시절인연 따라 화두가 타파될 것이다.

본문: 내 자리에 앉아서 참구하여 끝내 아무 터진 틈도 없는 도리를 요달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방장실에 들어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어지럽게 말씀드렸더니, “무슨 횡설수설이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즉시 마음속으로 복종하였는데, 참으로 눈 밝은 사람이 나의 가슴속 일을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해설: 원오스님처럼 머리 좋고 경전을 많이 봐온 분일수록, 사량 분별의 미세망념을 극복하기 어렵다. 본분의 실상 앞에서는 제 아무리 오묘한 도리라도 모두 망념일 뿐이다. 활구(活句)는 뜨거운 화로와 같아서, 알음알이의 눈이 내리는 즉시 흔적 없이 녹아버린다.

본문: 그러나 끝내 깨치지는 못하고 이윽고 산을 내려와 2년쯤 지나 돌아가서, 비로소 “소옥(小玉)아! 하고 자주 부른 것은 원래 딴 일이 아니라…” 한 구절에서 통 밑바닥이 빠진듯하여 전에 보여주신 것이 참다운 약석(藥石)이었음을 비로소 엿보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미혹했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바야흐로 진실 타당한 그 당처를 알게 되었습니다.

해설: 원오스님은 나름대로 애썼지만 깨닫지 못하자, 마침내 그 회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법연스님은 “이론으로는 생사를 대적할 수 없으니, 병상에 눕게 되면 스스로 체험해보라. 네가 절강 지방을 행각하다가 한 번 열병을 앓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원오스님은 과연 진강(鎭江)의 금산사(金山寺)에서 심한 열병을 앓게 되자 크게 뉘우치고, 급히 돌아와 오조 법연스님의 시자가 되었으며, 그리고 얼마 후에 인사차 찾아온 진제형 거사에게 ‘소염시(小艶詩)’를 가지고 법문해주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다가 인연 따라 홀연히 깨닫게 된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4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