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1. 개성사(開聖寺) 융장로(隆長老)에게 주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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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개성사 주지 융(隆)스님과는 정화(政和, 1111~ 1117) 연간에 상서현(湘西縣) 도림사(道林寺)에서 만났을 때 아교와 옻칠이 붙듯 화살과 칼끝이 부딪히듯 하여, 이 때문에 큰 그릇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종부(鐘阜) 땅에서 만났는데, 이미 큰 풀무 속에서 담금질을 마치고, 이 큰 일의 인연을 요달하여 날로 가까워지고 친근해졌다.
해설: 남송(南宋) 정화 연간이면 원오극근(1063~1125)스님이 임제종 양기파 오조법연의 법을 잇고, 50대의 원숙한 시기를 보내며 한창 무르익은 선지(禪旨)를 드날릴 때였다. 원오스님은 이때 재상 장상영의 귀의를 받고 호남 예주의 협산(夾山) 영천원(靈泉院) 벽암(碧巖)에 머물면서 설두송고(雪竇頌古)를 제창했는데, 문인들이 이것을 모아 ‘종문 제1서’라 불리는 <벽암록>을 편찬했다.
그 후 원오스님은 호남성 상서현 도림사로 주석처를 옮겼는데, 이때 대보추밀 등자상의 주천으로 조정에서 불과(佛果)의 호를 받았다. 이 무렵 호구소융(1077~1136)은 도림사로 원오스님을 찾아가 그 그릇을 인정받고 입실 제자가 됐다.
이후 20년간 가르침을 받고 후에 스승이 입적했을 때, 편지글을 모아 <원오심요>를 펴내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 편지는 호구소융이 개성사 주지로 있을 때 보낸 것으로, 그 법을 인정하여 ‘장로’로 불러주며 친근감과 부촉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
보검으로 邪見 자르고 殺活 방편 구사하여
공부인 망상 깨트려 살리는 솜씨 발휘해야
본문: 예로부터 내려오는 불조가 격식과 종지를 초월하였고, 천만 사람을 가두어도 머물지 않는 곳에서 털끝이나 바늘구멍사이에서 확연히 통하여 백천만억의 가없는 향수찰해(香水刹海)를 포용했다.
해설: 눈앞에 드리워진 은산철벽을 무너뜨리고 생사대사를 확철하게 해결하면, 한 순간에 세간의 모든 격식과 종지를 초월하게 된다. 뜨거운 풀무 속에서 담금질을 받다가 문득 생각이 끊어지고 근본 마음자리에 계합하여 순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면, 가는 털끝에 바다를 담고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무애자재하게 된다. 원오스님은 호구소융에게 본분사를 요달한 대장부라면, 이 정도쯤의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일러주고 있다.
본문: 그리고는 주장자로써 대대로 내려오는 성인들의 명맥을 하나하나 발현했으며 취모검 위에서 주장들을 뚝 끊어 버렸다. 울퉁불퉁한 나무 선상에 앉아 사람들에게 쐐기와 못을 뽑아주고 끈끈한 것을 떼어주고 결박을 풀어주어서 큰 자유를 얻게 했다.
해설: 법안(法眼)을 제대로 눈떠서 법의 상징인 주장자를 자유자재로 굴리는 명안종사가 됐다면, 과거 큰 스님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법맥을 여법하게 이어받아서 반야의 금강왕보검으로 수없이 어리석은 사견(邪見)들을 싹둑 잘라버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살활(殺活)의 방편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문하 공부인들에게 의단(疑團)의 장치를 시설하고 이것을 타파하게끔 이끌어서, 그들이 자기도 모르게 집착하고 있는 경계나 망상을 깨트리고 크게 살아 나오도록 해주는 솜씨를 지녀야 되는 것이다.
본문: 이문(夷門) 땅으로 찾아와 자리를 함께하여 의지하며 지낸지 오래됐다. 무엇보다도 임제스님의 정법안장 하나가 면면히 이어져 자명(慈明), 양기(楊岐) 두 스님에 이르렀으니 모름지기 바람도 들어가지 못하고 물도 적시지 못하는 영리한 놈이라면 살인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기개를 자부하고 깨달음의 ‘도장(正印)’을 높이 들어야 한다.
해설: 불조의 정법을 계승하는 고준한 임제 정종(正宗)을 이어받은 후학이라면, 임제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지고 사정없이 휘몰아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중도 불이법(中道 不二法)에 통달하여 하루 종일 움직여도 움직인 바가 없고, 종일 설법하여도 말한 바가 없이 무애자재한 본분납자라면, 사람을 죽였다 살리는 살인도·활인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인연 있는 공부인의 망상을 끊어주고 활발발하게 살려낼 수 있는 법의 도장을 지녀야 할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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