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으면 방편은 저절로 나오기 마련

〈45〉9. 고서기(杲書記)에게 주는 글

본문: 살펴보건대, 저 본분의 종풍은 월등히 뛰어나 지략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저들의 눈이 바른 것만을 바랄 뿐이었다. 올바른 종지를 붙들어 걸머쥐고 바른 종안을 갖추려면, 모름지기 처음부터 끝까지 골수에 사무쳐 실오라기만큼도 구애됨이 없어 아득히 홀로 벗어나야만 한다.

해설: 역대 조사들은 불법에 대한 안목이 투철한 것을 귀하게 여겼다. 눈이 밝으면, 방편은 저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바른 안목은 중도불이(中道不二)의 불법에 대한 확철한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속의 이분법(二分法)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추호도 구애됨이 없이 말끔하게 벗어나야만 비로소 불조의 혜명(慧命)을 이을 수 있다.

본문: 그런 뒤에야 정확하게 서로 이어서 이 위대한 법의 깃발을 일으키고 이 큰 법의 횃불을 밝힐 수 있다. 그리하여 마조(馬祖)·백장(百丈)·수산(首山)·양기(楊岐) 등의 스님을 계승할 뿐 외람되게 다른 곳을 넘보지 말라.

본분사 밝히기 전에는 대혜도 死地에서 고생

자재한 위신력 갖춘 공부인만이 법 잇고 전해


해설:
원오극근스님은 제자 대혜종고스님에게 본분에 대한 안목이 바로 서야, 이심전심으로 전등되어온 부처님의 법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간곡히 당부하고 있으며, 마조·백장·수산·양기로 이어지는 귀중한 임제종 양기파의 종지종풍을 결정코 소홀히 여기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여 전하라는 것이다.

대혜종고스님은 나이 서른 전에는 조동종의 가풍 속에서 공부하여, 조동종장들의 인정을 받고 설법까지 할 정도였다. 그 뒤 임제종 황룡파인 담당문준 선사의 회하로 가서 공부했으나, 담당스님이 입적하면서 원오극근 선사를 찾아가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대혜스님은 다른 곳을 행각하다가, 35세에 양자강 하구 남통(南通)의 천녕사에 주석하던 원오극근스님을 찾아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37세에 법을 이었던 것이다.

원오스님은 대혜스님을 다룰 때, 아주 혹독하게 몰아쳤다. 하루는 관원들이 찾아와서 방장실에서 함께 공양을 하는데, 대혜스님이 손에 수저를 들은 것도 잊고 멍하니 앉아있는 것을 보고 원오스님은 “저놈이 황양목선(黃楊木禪)을 하여 도리어 쭈그러드는구나” 하였다.

황양목은 잘 자라지 않는 나무로, ‘황양목선’이란 진취가 없는 공부를 일컫는 말이다. 후일 천하에 간화선을 펴는 대혜스님도 본분사를 밝히기 전에는 원오스님이 시설한 장치에 걸려들어, 금강권 율극봉에 갇혀 넋이 나간 것처럼 사지(死地)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살아나왔다. 그때부터는 스승은 분좌설법을 허락하고 법을 잇게 하였다.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정통수행법인 간화선은 대종장들의 휘하에서 치열하고도 혹독한 단련을 거친 끝에 명안종사가 된 대혜스님에 의해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이 소중한 돈오 수행법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져서, 불법에 대한 안목을 열고 생사대사를 해결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일인가!

­ 10. 보령(報寧)의 정장로(靜長老)에게 드리는 글

본문: 영산(靈山)에서 단독으로 전하고 소실봉(少室峯)에서 은밀히 내려준 법은 세상무리에서 우뚝 뛰어난 이를 요합니다. 이들은 티끌바람에 풀이 움직이는 것을 증험하고 눈빛이 형형하여 푸르른 하늘을 뚫습니다. 산이 막혀 있어도 일어났는지 자빠졌는지를 알며 소리를 삼키고 자취를 없애서 털끝만큼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물결 거슬리는 파도를 일으키고 흐름 끊는 기틀을 움직입니다.

해설: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하늘에서 제석천이 꽃비를 뿌리자 그 중 하나를 들어서 대중에게 보이셨다. 모두 망연해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다.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의 미묘한 법문이 있다.

이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 하셨다. 선종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께서 숭산 소림사 소실봉에서 이조(二祖) 혜가에게 은밀히 전한 법은 마치 용이 한 방울의 물만 있어도 풍운조화를 일으키고, 새가 허공을 하루 종일 날았어도 흔적이 없듯이 빼어난 기봉과 자재한 위신력을 갖춘 공부인만이 이어받고 전할 수 있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5년 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