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큰 힘’ 지니기 전 함부로 지도하지마라

5. 융지장(隆知藏)에게 주는 글

마음자리는 말해도 말한 바 없지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 아냐

본문: 나아가 중생들을 위해 응용할 경우에는 농사꾼의 소를 몰고 가버리고 주린 사람의 음식을 빼앗아서 완전함을 얻어 조금도 실수함이 없음을 증득해야만 바로 본분의 도류(道流)인 것이다.

해설: 선지식의 혹독한 단련을 이겨내어 미혹은 물론 깨달음마저도 다 내려놓은 후 온갖 시련마저 견뎌내서 마침내 불법을 감당할만한 법기(法器)임을 인정받은 연후에는, 학인들을 제접하여 법을 펴는 방편을 지녀야 한다. 중생은 분별망상의 습기에 젖어있으므로, 단칼에 구걸하는 사람의 밥통을 빼앗아버려야 한다. 이렇게 완벽한 수단을 구사할 수 있기 전에 가르치려들면, 자칫 어설프게 남도 다치게 하고 자기도 다치기 십상인 것이다. 그래서 옛 도인들은 공부가 된 후에도, 10~20년 선지식 곁을 떠나지 않든지, 한적한 곳에 숨어 지내다가 법 쓰는 법을 통달한 연후에야 비로소 저자거리로 들어갔던 것이다.

본문: 마갈타국에선 몸소 이 법령을 시행하였고, 소림의 9년 면벽(面壁)에선 바른 종지를 ‘온전히 제창(全提)’하였다. 그러나 뒷사람들은 뚝 끊겨 말 없는 것으로써, 우뚝한 만길 벼랑 같아 터진 틈도 없고 더듬어 볼 수도 없는 경계라고 잘못 알게 되었다.

해설: 부처님께서는 마갈타국의 니련선하 강변에서 성도(成道)하신 후, 범천의 권청을 받고 세상에 나가시기 전에 한동안 몸소 깨달으신 진리를 음미하며 움직이지 않으셨다. 달마대사는 양무제가 일심법을 알아듣지 못하자, 장강을 건너가 소림굴에서 면벽하며 때를 기다렸다. 비록 두 분께서 입을 여시지 않으셨지만, 그 자체가 이미 법을 온전히 드러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불조께서 깨달으신 마음은 이미 환하게 드러나 있어서, 따로 전해주고 받고 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모양 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침묵을 법으로 착각하여, ‘말없음’으로 도를 삼거나 ‘현애상(懸崖想)’을 내서 주춤거리기 십상이다. 이와 같다면 상(相)에 떨어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자리는 불이중도(不二中道)라서 아무리 말을 해도 말한 바가 없는 것이지, 그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본문: 그러나 이는 본분사를 전혀 잘못 알고 알음알이를 가지고 제멋대로 헤아리면서 문득 높은 견해인 양 여긴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큰 병통이다. 예부터 내려온 이 일은 본래 이런 적이 없었다.

해설: 깨달음의 체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세간과 출세간의 양쪽을 모두 소화하고 원융자재 할 수 있는 큰 힘을 지니기 전에는, 함부로 다른 사람을 지도해서는 안 된다. ‘선지식병’이나 ‘도인병’은 선문(禪門)에서 참으로 금기시되어야 할 병통이다. 알음알이를 철저히 조복시켜 미세망념의 뿌리를 끊어버려야 다시는 속지 않는다. 옛 분은 “어떤 것이 ‘말후구’입니까?” 하고 물어오자, 발 씻은 물을 얼굴에 확 끼얹어서 망상을 부수어 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물벼락을 뒤집어쓴 상대는 그 순간에 ‘말후구’ 도리를 깨달았다. 평상심이 도(道)다. 계합하려면 즉시 맞아 떨어져야지, 괜히 생각으로 더듬으면 벌써 어긋나고 만다.

본문: 암두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목전에 드러난 바로 이것은 부싯돌 불이나 번뜩이는 번갯불과 같다. 만약 밝히지 못했다면 의심하지 말라. 이는 향상인의 경계로서 그런 것이 있는 줄을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해설: ‘목전에 드러난 바로 이것은 부싯돌 불이나 번뜩이는 번갯불과 같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이것보다 더 빠르다. 이것까지도 포함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목전에 드러났다’고 하니까 또 무언가가 드러나는 거라고 오해하고 착각할는지는 몰라도, 이 일은 그런 한때의 시절인연에 상관없이 본래 몽땅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너, 나’ 할 것이 없고, 중생이나 부처나 다 똑같다. 이 일에는 ‘돈오무생(頓悟無生)’을 노래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공부인들이 함께 하는 것이지, 그런 힘이 없는 이들은 이치만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할 뿐이다. 본인이 실제로 체험하여 묵연히 점두(點頭)할 수 없다면, 이런 법문을 듣고 꽉 막혀서 발심을 해야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4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