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인연 따라 깨달았으니 영원히 잃지 않을 것이다”

4. 유서기(裕書記)에게 주는 글

한 번 복사꽃을 본 뒤로는

오늘까지 다시 의심이 없네

황룡혜남(黃龍慧南) 선사가 지난날 석상자명(石霜慈明)스님을 뵙기 전에는 ‘한 밥통의 선(一?皮禪)’만을 알았었다. 취암스님은 그를 가엽게 여기고 석상스님을 찾아보라고 권하였다. 임제종의 법맥을 이어온 석상자명(986∼1040)스님 아래에서 양기방회, 황룡혜남, 취암가진 등의 걸출한 선사들이 배출되었다. 황룡혜남은 처음에 늑담회징 선사 문하에 있었는데, 공부를 인가받고 분좌설법(分座說法)을 할 정도로 이름을 떨쳤었다. 그런데 취암스님은 그의 소견이 자기 뱃속이나 겨우 채우는 좁은 ‘일두피선’임을 꿰뚫어보고, 당대의 명안종사인 석상자명 선사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거기서 오로지 “영운스님은 투철하게 깨치지 못했다”고 한 현사스님의 말씀을 끝까지 캐 들어갔는데, 시절이 맞아서 기왓장 부서지듯, 얼음 녹듯 하여 이윽고 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30년을 이 도장으로 제방의 알음알이를 뽑아주었다. 병을 낫게 하는 데는 이런저런 약이 필요치 않으니, 긴요한 곳에 어찌 그 많은 불법이 있으랴.

영운지근(靈雲志勤)스님은 위산영우 선사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봄날 복사꽃 핀 것을 보고 깨닫고, 게송을 남겼다. “삼십 년 동안 칼을 찾던 나그네, 잎 지고 가지 돋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한 번 복사꽃을 본 뒤로는, 오늘까지 다시 의심이 없네.”

이 게송을 위산영우 선사에게 보였더니, “인연 따라 깨달았으니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잘 보호하여 지니도록 하라” 하고 인가했다. 그러나 후일 현사사비(玄沙師備)스님은 영운지근스님 면전에서 이 일에 대해, “매우 지당한 말이지만, 감히 장담컨대 노형은 아직 투철하게 깨치지 못했다”고 하였다.

황룡스님은 석상자명 선사 문하에 들어가 현사스님의 이 말씀을 궁구한 끝에, 마침내 일두피선을 뛰어넘고 실상에 계합하여 임제종 황룡파의 가풍을 천하에 드날리게 되었던 것이다.

훌륭한 종사가 학인을 위해서 정형화된 격식(?臼)이나 어떤 표방(露布)을 내걸지 않더라도, 오래가면 배우는 무리들이 잘못 알아 기어코 격식과 표방을 만든다. 달마스님께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종지를 세우신 후, 역대 조사들은 여기에 구구한 격식이나 표방을 덧붙이지 않았다.

육조스님은 우리의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고 구족하여서, 한 법이라도 더하거나 세울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고 방편이 번잡해지면서, 복잡한 형식이나 문자가 범람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격식 없음으로 격식을 삼고, 표방 없음으로 표방을 만든다. 모름지기 여기에 이르러서는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리고,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는 그런 일들을 모두 없애야 하리라.

원오스님이 법을 펴던 송대(宋代) 12세기에는 이미 문자선이 널리 퍼져서, 학인들은 고인이 공부한 흔적인 문자에 천착하여 알음알이를 공부로 삼는 일이 많았다.

원오스님은 항주 영은사에서 법을 펴고 있던 제자 불지스님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학인을 제접하는데 있어 번다한 방편에 집착하지 말도록 경책하고 있다.

기미보다 앞서서 비춰보고 먼지바람에 움직이는 풀에서도 그 단서를 알아차려야 하는데, 더구나 시끄럽게 세상살이를 하는 경우이겠느냐? 가슴이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것도 헤아릴 것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떻게 기미보다 먼저 사물을 알아차리고 착오 없이 원만하게 응대할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가 나가선정(那伽禪定)의 효험이다.

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대응하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통밑이 빠지고 눈이 밝아진 공부인이라면, 할 일이 없는 가운데서도 막상 일을 맞이하면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것이다.

본래청정한 보리자성에 계합하면 저절로 부처님의 삼매인 나가대정의 효험을 볼 것이니, 괜히 이런 말을 배워서 조작하려 들지 말고 오로지 확철히 견성토록 정진할 일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4년 10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