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본분 자리는 확연무성(廓然無聖)…‘부처 흔적’ 남지 않아

4. 유서기(裕書記)에게 주는 글

경계에 빠졌는지 막혀 있는지

정확히 가려내 공부인 살려야

만약 금강의 바른 안목을 갖추었다면,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말쑥한 경지에서 오로지 본분사를 가지고 지도할 일이다.

깨달음을 귀하게 여기는 본분작가는 믿음을 낸 공부인에게 안목을 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명안종사라면, 학인이 묻자마자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를 드러내 안목으로 이끈다.

만일 학인이 언하에 계합하지 못하면 사정을 두지 않고 거칠게 밀어붙여서, 의심의 고리가 가슴속 깊이 사무쳐서 걸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선지식의 진정한 자비다.

그러나 설사 견처가 부처님과 같다 해도, 그들은 오히려 부처님의 경지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이다.

본분 자리는 확연무성(廓然無聖)하여 부처라는 흔적도 남기지 않기에, ‘부처님의 견처’라는 분별망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조금이라도 얻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자가보장(自家寶藏)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것이므로 자성(自性)이 아니다.

한 물건도 세울 수 없는 자리에 ‘부처님의 경지’라는 견해를 세우면, 그것은 도리어 장애가 되어 법상(法相)이 된다. 공부인이 법상에 매여 ‘선지식병’에 걸리면, 설사 불조께서 오시더라도 고치기 어려운 고질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예부터 방(棒)을 휘두르고 할(喝)을 내뱉으며 한 기연과 한 경계, 한 마디 한마디가 모두 낚싯밥이었다. 홀로 벗어남을 귀하게 여길 뿐, 풀잎이나 나무에 붙어사는 도깨비짓을 무엇보다 꺼린다.

선지식께서 공부인을 다루는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 공부는 통밑이 빠진 것처럼 생사대사를 말끔히 벗어나야지, 조금이라도 알음알이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풀잎에 붙어사는 혼령과 다를 바가 없다.

이른바 농사꾼의 소를 빼앗고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다는 것이니, 그런 솜씨가 아니라면 모두가 흙장난이나 하는 자일뿐이다.

공부를 지도할 때는 학인이 오랜 세월동안 익혀온 분별망상의 의지처를 단번에 빼앗아버리고, 은산철벽 앞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깊은 우물 바닥에서 금강권(金剛圈)과 율극봉(栗棘蓬)을 스스로 타파하고 나오도록 장치를 시설할 수 있어야, 비로소 불조의 혜명을 잇는 명안종사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솜씨가 아니라면 공부인을 잘못 가르칠 뿐, 돈오 가풍을 이어간다고 말할 수 없다.

제방에서 찾아온 납자로서 숙세의 선근이 있어 공부를 하다가 곧장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자라도 진정한 종사를 만나지 못하면, 도리어 그를 끌어다가 격식을 표방하고 기연과 경계에 떨어져서 오랏줄 없는데 스스로 결박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한다.

빼어난 수행자가 본분종사를 만나면 더 큰 일을 해 마칠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상근기도 명안종사를 만나지 못하면 공부 분상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엉뚱한 길로 들어가서 경계에 머물고 만다. 그 어떤 격식도 세우지 않으면서 기연이나 경계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어야, 마침내 법맥이 마르지 않게 될 것이다.

비슷하기는 하나 옳지 않은 이것이 가장 처리하기 어렵다. 요컨대 그의 병맥을 알고 막힌 곳을 가려내며 치우친 곳을 캐물어 일깨워주고, 집착과 막힘을 버리게 해야 한다.

공부인이 어떤 경계를 체험하고 식(識)이 맑아져서 이치를 막힘없이 이해하고 도리를 설파하기도 하며, 혹은 한 번 맛본 경계를 지속시키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이것은 옳지 않은 병폐로서, 경계를 법으로 착각한 것이다.

명안종사라면 마땅히 공부인이 어떤 경계에 빠져있으며, 어떤 병에 걸려 막혀있는지를 정확히 가려내어, 급소에 침을 놓아 죽어가는 공부인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학인을 제접하여 이끌어주는 요긴한 대목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4년 10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