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내게 욕되게 하면, 물러나 스스로 비춰보라”

3. 원수좌(圓首座)에게 주는 글

잘못이 없으면 일체를 따지지 말며

생각 움직여 성내고 원망하지 말라

본문: 옛 스님은 말하기를, “촌구석(三家村) 그대로가 저마다 총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총림이 없는 곳엔 뜻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편리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더욱 편리함에만 집착하게 되니, 반드시 힘써서 끝까지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해설: 정진 중에 어느 정도 공부가 익고 살림이 넉넉해지면, 자칫 해태심이 일어날 수가 있다. 그때 잠시 한 눈 팔면, 자신도 황폐해지고 주변에 이익을 나누어줄 수도 없게 된다.

참된 공부인이라면 늘 부끄러움을 알고 하심하며, 스스로 경책하면서 살아야 한다. 좋은 일이 생길수록 더욱더 부처님 전에 회향하면서 마음을 넓고 깊게 쓴다면, 갈수록 더 좋은 인연들이 다가오는 것이 법계의 이치다.


본문: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시끄러운 곳에선 두루두루 변화에 응하되 속은 텅 비고 고요하여, 텅 비고 고요한 곳에서는 고요함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해설: 공부가 익어 견처(見處)가 확실한 사람이라면,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 보배를 꺼내 쓰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여유가 생긴다.

바쁜 흐름 속에서 종일 시끄럽게 움직여도, 마음자리는 움직인 바가 없다. 당처에서 여여하면 아무 일이 없이 무심하지만, 인연 따라 일이 닥치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처리한다. 아무리 번잡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한 생각 내려놓으면 그뿐으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이렇게 인연을 잘 살펴서 수용하는 넉넉한 마음의 공부인이라면, 마치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저절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공부인연을 열어주고 그 덕화를 베푸는 것이다.


본문: 그렇게 되면 가는 곳마다 모두 나의 활발한 생활이다. 오직 속은 비고 밖은 따라주면서 근본이 있는 자라야만 이럴 수 있다.

해설: 성숙한 공부인이라면, 이미 몸에 훈습된 인연들을 숙성시켜서 자기도 모르게 뿜어낸다. ‘착한 행동을 해야지’가 아니라, 저절로 착한 행동이 나오도록 하는 입장에서 이미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공부가 익으면 익을수록,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연으로 거듭 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진정한 믿음이라 한다. 이것은 ‘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라, 저절로 부처님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힘을 지니고 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불법 공부의 힘을 믿고 정진해야 한다. 살얼음 걷듯이 조심하고, 늘 가랑비에 옷 젖듯이 시간을 기다리면, 때가 되면 온갖 공덕이 절로 넘치게 된다.


본문: 선지식이 된 자는 자비와 부드러움으로 중생들을 잘 제도하되, 평등하여 다툼이 없도록 처신해야 한다. 상대방이 나쁜 마음을 먹고 내게 욕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게 내게 관여해 오고 헐뜯고 욕되게 하는 경우에는, 다만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자기에게 잘못이 없으면 일체를 따지지 말며, 생각을 움직여 성내거나 원망하지도 말아라.

해설: 선지식의 ‘자비와 부드러움’은 세속의 입장과는 달리, 근본바탕이 밝아진 힘에서 나오는 지고지선(至高至善)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제도할 중생이 본래 없다’는 실상을 소화시킨 힘이어서, 상대적인 차원의 자비와 부드러움을 넘어서 말없는 가운데서 스스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힘에 의해 자기 안의 중생을 먼저 제도하고 마침내 스스로 자비롭고 부드러워지면, 자연히 그 기운이 흘러넘쳐 저절로 주변의 어리석음을 교화하여 더 좋은 인연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방편을 드리우는 것이다.

만일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 갈등이 일어난다면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비추어 보아서, 온갖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는 넓고 깊은 바다처럼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어야 한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4년 8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