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모른다’ 한 마디가 가장 친절한 말

3. 원수좌(圓首座)에게 주는 글

양심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인정하고

근원 의심에 집중하는 것이 바른 공부인

본문: 도를 체득한 사람은 선 자리가 고고하고 우뚝하여 어떤 법과도 마주하지 않는다. 티끌 하나 건드리지 않고 움직이니, 어찌 풀 하나 까딱 않고 숲 속에 들어가며, 물결을 일으키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정도에 그치랴.

해설: 도와 계합되면서 상(相)을 여의게 되면, 자연히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부처님께서 평생 걸어 다니셨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발을 땅에 디디신 적이 없다”는 말처럼, 매사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본문: 그런 가운데 속이 이미 텅 비어 고요하고 밖으로는 대상에 응하는 작용이 끊기면 어느덧 저절로 무심을 철저히 깨치게 되니, 비록 만 가지 일이 단박에 닥쳐온다 해도 어찌 거기에 정신이 휘둘리랴. 평상시에는 마치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듯 한가함을 지키다가도 사물에 임하게 되어서는 애초에 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헤아리고 결단함이 바람이 돌고 번개가 구르듯 기연에 딱딱 들어맞으니, 어찌 본래 지켜온 것이 아니겠느냐.

해설: 일체 경계가 아무리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 하더라도, 본래 무심자리는 늘 그러해서 적연부동(寂然不動) 하다. 이 자리에 통한 사람은 평소에는 일없이 한가한 듯 보이지만, 인연에 응해서 움직일 때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정확하다.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즉시 아무런 흔적 없이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이 자리에 어두우면 일마다 어떻게 해보려고 도모하여 갈등을 일으키겠지만, 늘 이 자리가 눈앞에 분명하다면 따로 노력을 같이하지 않더라도 매사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하지만 이런 말을 배워서 재주를 피우면, 설사 이치를 알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독화살을 맞은 것과 같아서 법상(法相)만 높아질 것이다. 임제스님도 “삼구(三句)에서 깨치면 자기 자신도 구제 못한다”고 하였다.

스스로 양심을 속이지 않고 ‘모르겠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근원에 대한 의심에 집중하는 것이 바른 공부인의 모습이다. 우직하게 정신적인 벽 앞에 꽉 막혀 오직 뚫고나가기만을 애쓰는 것이 알고 보면 가장 정확한 길이다. 옛 어른은 “모른다는 한 마디가 가장 친절한 말이다”고 하였다.


본문: 옛 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이 활쏘기를 배울 때, 오래도록 쏘아야만 비로소 적중시키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깨닫는 것은 찰나이나 공부를 실천해가는 데는 모름지기 긴 시간을 요한다. 마치 비둘기 새끼가 태어나서는 붉은 뼈가 허약하지만, 오랫동안 먹이를 주고 길러서 깃털이 다 나면 문득 높고 멀리 날 줄 아는 것과도 같다.

해설: 본래 무심자리에는 ‘찰나’도 없고 ‘긴 시간’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몸뚱어리를 가지고 쓰는 입장에서는 묵은 습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깨달음의 순간에는 찰나지간에 앞뒤가 뒤바뀌지만, 무시이래로 자기도 모르게 간직해온 업은 점차적으로 닦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능엄경>에 “이치로는 몰록 깨달아 한꺼번에 녹이지만, 실제로는 즉시 제거되지 않고 차제를 밟아 없어진다(理則頓悟 乘悟竝消 事非頓除 因次第盡)”고 했다.


본문: 그러므로 투철하게 깨닫는 요점은 바로 다스림(調伏)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모든 티끌 경계가 항상 흘러들어와 속을 꽉 막으나 체득한 사람에게는 완전히 뚫려 있으니, 모두가 자기의 큰 해탈문이다. 종일토록 무엇을 해도 한 적이 없고, 좋고 싫음이 전혀 없으며 권태도 없다.

해설: 안목을 열어 변화된 모습을 수용할 수 있는 근거를 지니고 시간을 보내면, 온갖 경계가 자연히 조복되어진다. 마침내 근본을 확철하게 밝히고 법안을 열게 되면, 본래 막힌 적도 없고 조복시킬 마음도 따로 없음이 자명해진다.

그렇다고 “본래 해탈되어 있으니 허망하게 따로 찾고 구하지 말아야지”하고 알음알이를 내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도 안 된다. 이것은 오히려 참된 해탈을 가로막는 병이라서 매우 경계해야 한다. 오직 근본실상을 직접 체험하고 확인해야, 비로소 모든 의심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수불스님 |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불교신문 2014년 7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