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스님이 들려주는 결 고운 내면의 울림

『소리-파도소리를 타고 들어가라』
일선 스님 지음 / 클리어마인드

일선 스님이 사는 곳은 남도의 섬 거금도입니다. 최남단에서 다시 뱃길로 20여 분 들어가야 하는 섬. 거기서도 인적 드문 외진 곳에 금천선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스님은 파도소리를 벗 삼아 수년 째 이곳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홀로다 보니 밥 짓고 빨래하고 텃밭 농사를 짓는 일도 오롯이 스님의 몫입니다. 벼르고 별러 여행을 떠나도 사나흘 지나면 사람들의 숨결이 그리운 게 보통사람인걸 감안하면 스님은 천생 수행자인가 봅니다.
일찍이 의문을 품었다는 스님은 조계산 송광사로 출가했습니다. 벌컥벌컥 찬물을 들이켜도 해소되지 않던 내면의 깊은 갈증, 학창시절 내내 ‘나란 누구인가’라는 생각에만 골몰하던 스님에게 어쩌면 출가는 예견된 길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엄격한 행자교육으로 유명한 승보종찰에서 세간의 묵은 습을 훌훌 털어낸 스님은 중앙승가대를 졸업하고서야 마침내 그토록 원했던 화두수행에 온 몸을 내맡길 수 있었답니다.

언어 이전의 한 구절은 일천 성인도 전하지 못했다던가요. 스님은 진리에 대한 간절함으로 옛 조사스님네들이 걸었을 그 길을 묵묵히 따랐습니다. 특히 수행자의 사표로 일컬어지던 조계종 전 종정 서암 큰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더군요. 태산 같은 자부심, 쓰러진 풀 같은 겸손함, 범 같은 위엄, 어머니 같은 자비심…. 스님이 지금 홀로 무소의 뿔처럼 꿋꿋이 정진할 수 있는 데에는 당시 큰스님이 보여준 자비행화도 한 몫 톡톡히 하지 않았을까요.

널리 알려졌다시피 스님은 노련한 사찰수련회 지도법사이기도 합니다. 십수년 간 송광사에서 수련회를 이끌었던 노하우 덕도 있겠지만 형식화된 선(禪)이 아니라 체험을 바탕으로 살아 숨 쉬는 선을 대중에 전달하려는 스님의 펄펄 끓는 열정 때문일 겁니다. 암튼 오랜 세월 수행의 방편으로 수련회를 지도했고 그 후 조용한 섬에서 수행의 끈을 바짝 조이던 스님이 법보신문의 갑작스런 ‘세심청심’ 연재 요청을 받아들이기까지 여간 큰 결단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문경 봉암사를 비롯한 제방선방에서 정진했던 스님에게 수행은 들숨날숨처럼 익숙하지만 글쓰기란 남의 일처럼 생경했기 때문입니다. 허나 결과적으로 그건 기우일 따름이었습니다.

서울의 유명 꽃집에 전시된 매끈한 장미가 아니라 산길에서 마주한 청초한 야생화라고나 할까요. 이구동성 스님의 글이 너무 좋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심지어 선의 지혜로 풀어 쓴 한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라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청량한 언어로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의 변화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섬의 바람과 구름, 천변만화하는 황혼의 풍경, 파도와 풀벌레들의 속삭임을 비롯해 고단한 어민들의 삶까지 가만히 들려주었습니다. 스님의 글을 읽다보면 간혹 거금도의 모래밭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겁니다.

그러면서도 늘 스님의 이야기는 선(禪)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간화선의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역대 조사의 가르침을 하나로 관통하는 길이며 그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어떤 인위적인 노력 없이 세월만 흐르면 흐물흐물 업장이 녹아지게 된다는 말씀이시죠. 우리의 성품이 허공과 같아서 밝고 어둠에 상관없는 천연한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유리알처럼 투명한 스님의 그간 글들이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 나왔습니다. 『소리-파도소리를 타고 들어가라』가 바로 그것으로 예쁜 사진들과 깔끔한 편집도 돋보입니다. 추천사를 쓴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이 “한동안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낸 후에 세상 밖으로 나와 허물을 벗고 시원스럽게 울어대는 매미처럼 도반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구려.”라고 찬탄한 것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충분히 이해되리라 믿습니다.

‘섬’은 옛 불경의 언어인 팔리어로 ‘디빠(dipa)’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단어에는 ‘등불’이라는 의미도 있답니다. 그러니까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을 ‘스스로를 등불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흔히 풀이하지만 ‘스스로를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으라’ 해석해도 틀리지 않는다는 얘기겠죠.

섬에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일선 스님의 글도 섬을 닮아 있습니다. 때때로 난파선처럼 출렁이는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 어렵다거나 혹은 삶의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고 느껴진다면 가만히 이 책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현미를 씹듯 스님의 글을 꼭꼭 씹다보면 인생이라는 고해의 바다에서 스스로 섬을 찾아갈 수 있는 지도와 나침반을 손에 쥐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12,000원.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법보신문 / 2008년 8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