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불교의 종가 지리산 벽송사를 가다

“혼돈의 시기일수록 더 탁마해야”

일부 공직자의 종교 편향 행태에 따른 불교계의 시름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럴수록 더 공부하고, 탁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그 한복판에 지리산 벽송사가 있다.

지난 6일 수행 열기가 높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벽송사를 찾았다. 국내 3대 계곡 중 하나인 지리산 칠선계곡 초입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벽송사는 앞도, 뒤도 지리산에 틀어막혀 있다.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이 야전병원으로 이용할 정도로 깊은 산속이어서 가히 불교 천혜의 수행처로 꼽힐 만했다.

벽송사 벽송선원은 지난해부터 공부 모임인 ‘선회(禪會)’를 복원해 전국 각지에서 온 비구, 비구니 스님 90여명이 수행 정진 중이다. 이날 입재식 때부터 스님들은 선방인 청허당에서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선(禪)과 교(敎)를 병행하는 수행에 집중했다. 이들의 수행 열기는 한낮의 더위도 무색케 했다.

벽송사는 1520년 벽송(1464∼1534) 대사가 산문을 열었고, 벽송의 제자이자 한국 선불교의 양대 산맥인 청허(서산대사ㆍ1520∼1604)와 부휴(1543∼1615) 대사가 수행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부용(1485∼1571) 선사 등 선교 겸수 대종장도 108명이나 배출됐다. 벽송사는 6ㆍ25전쟁 의 폐허를 딛고 간헐적으로 선맥을 이어오다 금니사경의 대가 원응 스님을 만나 본격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고, 2년여 전부터 한국 불교의 ‘떠오르는 별’ 월암 스님을 주지겸 선원장으로 맞이하면서 선교 겸수 도량의 전통을 되살리고 있다. 월암 스님은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의 재정 지원을 받아 2개의 커다란 선방과 당우를 새로 짓는 등 중창불사를 마친 바 있다.

선회 참석 수좌들은 6일부터 27일까지 아침저녁으로 2시간씩 화두를 놓고 좌선 실참을 하는가 하면, 하루 두 차례 선어록을 중심으로 한 교학 강좌에 귀를 기울인다.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수덕사 수좌 설정 스님,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 동국대 원로교수 법산 스님,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 선원수좌회 대표 영진 스님,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 해인사 율주 종진 스님, 법인정사 선원장 설우 스님, 벽송선원장 월암 스님 등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교선사(敎禪師)들이 강사로 나선다.

벽송사는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도 많다. 보물 제474호 ‘벽송사 3층석탑’을 비롯해 시도민속자료 제2호 ‘벽송사 목장승’, 사찰 상층부에 자리 잡은 미인송과 도인송 등이 그것이다. 3층석탑은 신라 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며, 목장승 ‘금호장군’과 ‘호법대장군’은 무서우면서도 순박하고, 위풍 당당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장승의 모습을 오롯이 보여준다. 옛 법당터에 자리 잡은 미인송과 도인송은 절세미인의 모습과 의젓한 수도자의 형상으로 방문객을 압도한다.

또한 도보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산내암자 서암의 각종 돌조각상도 희귀한 볼거리다. 원응 스님이 조각가를 불러 1989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주위의 자연석 암반 위에 석굴암, 사천왕상 등 다양한 불보살의 세계를 양각해 놓았는데, 그 화려함과 정교함이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벽송사(함양)=글ㆍ사진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세계일보 / 2008년 9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