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조사와 선객이 함께 하는 영산회상”

지리산 벽송사 중창불사 마무리…불사지원 안국선원에 ‘돈오선’ 기증

5월 16일 지리산 벽송사에서 ‘돈오선, 출판 기념 및 봉정법회’가 열렸다. 벽송사 선원장 월암 스님이 저술한 <돈오선>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 스님이 벽송사 불사를 위해 20억 원이라는 거액을 쾌척하여 벽송사가 예전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벽송사 중창불사는 이제 95%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하안거 해제를 하고 나서 가을에 정식으로 낙성식을 할 예정이다.

벽송사의 당우들은 지나치게 하늘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땅을 가로막지 않아 지리산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이번 중창불사에서 당호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원으로 사용될 ‘청허당’은 서산대사의 법명이다. 그리고 요사 및 보림을 위한 건물로 사용될 ‘안국당’은 안국선원의 이름을 딴 것이다. ‘백장루’는 공양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경구로 유명한 백장선사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원통전 뒤쪽에 부용연관조사를 기리는 ‘부용암’이라는 토굴을 지었다. 그리고 1910년대 벽송사의 마지막 조실스님인 초월동조 스님을 기리는 ‘초월당’이라는 작은 당우를 한 채 지었다. 월암 스님은 당호 하나에도 이렇게 세심하게 벽송사의 역사를 아로 새겨놓았다.

◀증명법사 설정 스님의 축사모습.
<돈오선> 출판기념식에는 진귀암 선원장 심우 스님, 통도사 선원장 지근 스님, 봉선사 前주지 철안 스님, 월정사 한주 현도 스님을 비롯하여 40여 선객들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리고 20억불사의 시주가 되었던 안국선원의 불자 1600여명이 참석하여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이루었다.

이 법회의 증명법사 설정 스님(수덕사 수좌)은 “책을 내고 이렇게 모여 서로 법문을 주고받는 이런 자리가 바로 영산회상입니다. <돈오선>은 선지식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입니다”라며 또 다른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날 법회는 월암 스님이 수불 스님에게 보은을 하는 아름다운 자리였기에 행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불자들의 가슴은 훈훈함으로 가득 찼다.

글=문윤정 논설위원  사진=박재완 기자


[인터뷰]
월암 스님 “안국선원의 무주상 지원에 감사”

“현상계와 물질계가 허망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현상계와 물질계를 떠나서는 살수 없습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렇게 큰 불사를 해주신 수불 스님께 그 고마움은 말로는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이만한 불사를 이룩한 것도 중요하지만, 요즈음 종문의 풍토가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형과 사제, 도반사이의 신뢰성이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문수학한 사이도 아니고 도반사이도 아니고, 선원에서 같이 정진한 사이도 아닌 무관한 사이인데도 이렇게 큰 중창불사를 하였다는 것은 조계종문에서 보기 드문 일입니다. 조계종문에서 아름다운 일이고 그야말로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수불 스님과 안국선원의 보살님들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까 참으로 많이 생각한 끝에 <돈오선>이라는 책을 써서 봉정한 월암 스님. 스님은 “수불 스님과 제가 정신적으로 계합하여 이룬 불사를 바탕으로 벽송사의 맥을 이어가기를 서원한다”며 무주상 지원을 해 준 안국선원에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수불 스님 “선교겸수 도량 모습 되찾아 감사”

수불 스님은 25년 전 범어사 내원암에서 공부할 때 꿈을 꾸었다. 그 후 운수납자로 이 사찰 저 사찰을 다녀보았지만, 꿈에서 본 그런 사찰을 만날 수 없었다. 2006년 봄 월암 스님이 <간화정로(看話正路)>라는 책을 한권 보내주었는데, 읽어보니 너무 좋았다. <간화정로>를 저술한 월암 스님을 만나고 싶어 벽송사에 하안거 대중공양을 했다. 벽송사를 본 순간 바로 25년 전 꿈에서 본 그 사찰임을 알았다. 그때 수불스님은 ‘내가 전생에 벽송사에서 살았구나’하고 생각했다. 월암 스님의 면면이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고 있는 터이지만, 2006년 하안거 대중공양 와서 처음으로 만났다.

초면인데도 오랜 도반처럼 살가웠고, 월암 스님에게 큰일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불 스님은 그 자리에서 지금 벽송사가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물었다. 그러자 월암 스님은 “벽송사가 원래는 선교를 겸수한 그런 도량인데 다시 그 모습을 찾고 싶다”고 했다. 첫 만남이었는데도 수불 스님은 그 자리에서 20억이 소요되는 중창불사를 약속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월암 스님을 만났을 때 끈끈한 어떤 인연이 느껴졌고, 전생에 도반이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불사이다.

“물론 절 100채를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월암 스님의 <간화정로>나 <돈오선> 한 권이 더 중요합니다. <돈오선> 같은 책은 신도들의 공부와 정신을 지탱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또 힘이 됩니다. 우리 선승들은 정신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현상에 끄달려서는 안됩니다.”

수불 스님은 “오히려 월암 스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공부만 해도 바쁜 사람인데 불사를 맡겼으니 미안한 일이며, 여법하게 일사불란하게 불사를 마쳐주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단다.


벽송사는..
선교겸수 종장 108명 배출한 ‘행화도량’

벽송사는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였다.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碧松 智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선사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禪敎)를 겸수한 대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고도 한다.

벽송 지엄대사는 중국 수나라의 화엄 2조 지엄대사에 견줄만하다 해서 법명을 지엄으로 불렀다. <대혜어록>을 보다가 중국 조주선사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무자화두(無字話頭)에 의심을 일으켜 참구하다 의심덩어리를 타파하였다.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가 부용휴관인데, 그의 문하에 가장 뛰어난 제자가 서산대사와 부휴선사이다. 서산대사는 벽송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제 3대 조사가 되어 지리산에서 행화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진력을 다하였다.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벽송사는 전쟁으로 인해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60년대 이후 원응(元應)대사의 원력에 의해 선원과 법당, 요사 등 건물의 일부가 중건됐다.

[현대불교신문 / 2008년 5월 20일]